[이 아침에] 노예는 투쟁할 줄 모른다
얼마 전 신문에서 공감이 가는 글을 만났다. 현대 사회를 분석하며 ‘우리는 이미 지구라는 정신 병동에 함께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이었다. 그래서 갇혀버리지 않는 일상이 되기를 꿈꾼다. 잘못된 습관에 저항하지 않아 결국은 악습이 된 두 번째 본성과, 존재로 지향하는 참된 자아로서의 본성이 대치 상태로 싸우는 것은 두 본성의 결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과 존재가 지향하는 자유는 확연히 갈라지는 길이다. 이 길을 뒤섞어 놓고 원하는 대로 선택하게 된 것은 판도라의 빗장이 풀렸음을 의미한다. 판도라는 끝을 모르는 욕망이다. 통제가 되지 않을 때는 파괴의 위력으로 다가온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 또한 점진적으로 높아져 미친 놀이판의 면적 또한 넓어져만 간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는 이 사회적 불안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밤의 어두움은 더 기괴한 느낌이다. 창조적인 영감을 주던 그때의 그 밤이 아닌 것 같아서 저녁 시간 교회에 나가는 일도 망설인다. 새벽에도, 대축일 늦은 밤에도 걸어가서 참석하곤 했는데….모든 스케줄이 태양이 떠 있을 때까지로 고정되어 버린 듯하다. 나 역시 태양의 빛을 따라서 일상을 시작하고 끝내기로 했다. 새벽 다섯시쯤에 일어나 명상 1시간, 스트레칭 40분, 그리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삶은 계란과 치킨 소시지, 전날 만들어 둔 샐러드와 커피 한잔이다. 9시쯤이면 손빨래를 하고 손글씨를 쓰고 신문을 읽는다. 점심 전까지 손과 두뇌를 움직이기 위해 꼭 하는 것이 필사와 독서다. 필사는 속도가 느리긴 해도 독서보다 기억의 기능이 좋아진다. 오후 3시쯤엔 요구르트와 넛 종류로 이른 저녁식사를 한다. 중간중간 레몬수를 마시고, 과일과 집에서 구운 팥 소가 든 홀그레인 호떡도 먹는다. 먹는 일이 심플해지면 삶의 짐에서도 가벼워진다. 자유는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덜어내는 행위이다. 소유하려는 것은 탐욕의 반복일 뿐 자신의 모든 것을 쓰레기통으로 만들게 된다. 정신병동의 면적이 넓어지도록 놔두고 싶지 않다. 너무 풍요로워서 불행해진다면 가던 길을 바꿀 것이다. 나에게는 가난과 자유가 터닝 포인트였다. 정신병동이나 다름없었던 늪을 빠져나오도록 다그치는 각성의 소리를 따르게 되었는데, 사막으로의 여정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텐트의 역할 그 이상이 되어주지 못하는 육신을 끌어안고, 적게 먹고, 쓰고 사용하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공동의 유산임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했다. 지구촌의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마실 물 조차 모자라는 실정이다. 선진국의 미래는 생태학적 빚더미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성하도록 만든다. 개개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자업자득이기에 그렇다. 온전해진 내면의 힘이야말로 창조목적으로 이끄는 것을 더욱 원하고 선택하게 한다. 파괴의 목적을 멈추고 생명 창조로의 전환을 위해서 정신병동에 갇히지 않으려면 생활 방식에 투쟁이 있어야 한다. 최경애 / 수필가이 아침에 노예 투쟁 본성과 존재 정신 병동 사회적 불안감